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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꽤 오랫동안 말을 잘한다고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막힘없이 했고, 논리도 나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가족과의 대화에서 계속 어긋났습니다. 말이 많은 사람이 꼭 대화를 잘하는 건 아니라는 걸, 《말그릇》을 읽고 나서야 제대로 깨달았습니다.

말하는 기술보다 말을 담는 그릇이 먼저다
저는 말하는 기술, 그러니까 커뮤니케이션 스킬(communication skill)을 늘리면 관계가 나아질 거라고 믿었습니다. 커뮤니케이션 스킬이란 상대를 설득하거나 자신의 의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언어적 기법을 뜻합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며 제 착각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술보다 그릇이 먼저라는 이야기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꽂혔습니다.
저자 김윤나는 코칭 심리학을 기반으로 말의 본질을 풀어냅니다. 코칭 심리학(coaching psychology)이란 개인의 내면 자원을 발견하고 스스로 변화를 이끌어내도록 돕는 심리학의 한 분야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말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내면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는 통로입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감정이 격해진 순간에 내뱉은 말이 얼마나 오래 남는지 모릅니다. 사과를 해도 그 말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더라고요. 정서 조절 능력(emotional regulation)이 떨어진 상태에서는 아무리 좋은 표현을 알고 있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정서 조절 능력이란 분노, 불안, 서운함 같은 감정이 올라올 때 그것을 인식하고 다스리는 심리적 역량을 말합니다. 그릇이 작으면 감정이 조금만 차올라도 넘쳐버리는 것처럼, 내면이 단단하지 않으면 말도 거칠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말그릇을 키운다는 것은 결국 이 정서 조절 능력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저는 이해했습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체념하는 대신, 내 안의 감정 패턴을 들여다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내 말을 망가뜨리는 건 생각의 공식이었다
직접 겪어보니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따로 있었습니다. 제가 상대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듣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도 모르게 제 기준으로 걸러서 듣고 있었습니다.
책에서는 이것을 인지적 왜곡(cognitive distortion)이라고 표현합니다. 인지적 왜곡이란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경험 틀에 맞게 해석하는 사고 패턴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이래야 해"라는 암묵적인 공식이 강할수록, 그 공식에서 벗어난 상대의 말은 틀린 말이나 공격으로 들리기 쉽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상대가 잘못 말한 게 아니라, 제가 잘못 들은 경우가 훨씬 많았습니다.
실제로 한국심리학회의 연구에 따르면 대인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상당 부분은 상대방의 의도를 오해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귀인 오류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귀인 오류(attribution error)란 타인의 행동을 그 사람의 성격이나 의도 탓으로 돌리는 인지적 편향입니다. 제가 가족과의 대화에서 자주 범하던 실수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말 습관을 바꾸려면 먼저 이 공식을 깨야 합니다. 제가 실제로 써본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상대가 말을 끝낼 때까지 제 머릿속에서 반박문을 쓰는 것을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쉽지 않지만, 이것만 해도 대화의 질이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말 습관을 점검할 때 확인해 볼 핵심 신호는 다음과 같습니다.
- 상대가 말하는 도중 이미 대답을 준비하고 있다
- 다른 의견이 나오면 반사적으로 방어하거나 설득하려 한다
- 대화 후 '내가 맞았다'는 확인을 원한다
- 감정이 격해지면 목소리가 커지거나 말이 빨라진다
이 중 하나라도 해당된다면, 말그릇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잘 들으면 좋은 질문이 따라온다
저는 듣는 게 어렵습니다. 솔직히 이건 지금도 진행 중인 과제입니다. 상대가 말하는 동안 입이 근질거리는 느낌을 꽤 자주 받습니다. 그런데 직접 겪어보니, 그 충동을 조금만 참고 끝까지 들었을 때 대화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경청(active listening)은 단순히 조용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청이란 상대의 말속에 담긴 감정과 맥락까지 함께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듣기 행위를 말합니다. 이렇게 들으면 자연스럽게 좋은 질문이 따라옵니다. "왜 그랬어?"라는 추궁 대신 "그때 어떤 마음이었어?"라고 물을 수 있게 됩니다. 같은 상황에 대한 질문이지만, 상대가 느끼는 온도는 완전히 다릅니다.
잘 들으면 상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도 보입니다. 조언이 필요한지, 그냥 들어주길 바라는지, 아니면 함께 답을 찾고 싶은지. 이 차이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대화의 결이 달라집니다. 제 경험상, 많은 갈등이 상대가 원하는 것과 제가 제공한 것이 어긋나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국내 상담심리 연구에서도 공감적 경청이 관계 만족도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결과가 꾸준히 보고되고 있습니다(출처: 한국상담학회). 공감적 경청(empathic listening)이란 상대의 감정에 진심으로 반응하며 그 경험을 함께 이해하려는 듣기 방식입니다. 기술보다 태도의 문제라는 점에서, 이건 누구나 연습으로 키울 수 있는 능력입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말이 더 어렵다는 건 저도 공감합니다. 오히려 익숙하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게 됩니다. 그 어떤 타인보다 더 존중하고 배려해야 할 사람이 가족이라는 걸 알면서도, 실천은 늘 부족합니다. 말은 흔적을 남깁니다. 상처 주는 말은 줄이고, 사랑을 표현하는 말은 아끼지 않는 것. 그게 말그릇을 키운다는 것의 실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말그릇》을 읽고 나서 달라진 것은 거창한 대화 기술이 아닙니다. 상대가 말을 마칠 때까지 조금 더 기다리는 것, 감정이 올라올 때 잠깐 숨을 고르는 것. 그 작은 변화가 관계의 온도를 바꾼다는 걸 직접 경험했습니다. '나는 원래 말을 못 해'라는 말을 핑계로 삼지 말고, 말그릇을 조금씩 넓혀가는 연습을 해보시길 권합니다. 대화가 달라지면 관계가 달라집니다.
참고: 《말 그릇》 김윤나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