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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얘기를 털어놓고 싶었던 적이 있으셨나요? 저는 한동안 그런 사람 하나가 간절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대단한 조언이 필요했던 게 아닙니다. 그냥 들어줄 사람. 그 마음으로 집어 든 책이 바로 김호연 작가의 《불편한 편의점》이었습니다. 원래 소설을 즐기는 편이 아닌데, 이 책에 완전히 반해버렸고 결국 작가의 다른 책들까지 다 읽게 되었습니다.

경청과 공감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회복력
서울 청파동 골목 안쪽, 이름도 무색하게 불편하기만 한 편의점 'ALWAYS'에 어느 날 야간 알바생이 들어옵니다. 계산도 굼뜨고 말도 어눌한 노숙자 출신의 독고씨입니다. 그는 알코올성 치매(alcohol-induced dementia)를 앓고 있습니다. 알코올성 치매란 장기적인 과음으로 인해 뇌 신경이 손상되어 기억력과 인지 기능이 저하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편의점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어설픈 알바생이 해내는 일이 있습니다. 손님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는 것입니다. 취업을 포기한 아들 때문에 속이 타들어가는 주간 알바생 오선숙, 매일 밤 야외 테이블에서 참깨라면 하나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생계형 가장 경만, 슬럼프에 빠져 글이 막혀버린 극작가 정인경. 이들은 모두 독고씨의 묵묵한 경청 안에서 조금씩 숨통을 틔웁니다.
여기서 주목할 개념이 '활성 경청(active listening)'입니다. 활성 경청이란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을 넘어, 상대방의 감정과 맥락까지 이해하려는 의도적인 듣기 방식을 의미합니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활성 경청은 상대방의 심리적 안전감을 높이고 관계 만족도를 유의미하게 향상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독고씨가 특별한 말을 건네는 게 아닙니다. 그저 들어주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달라집니다. 제가 그 장면들을 읽으면서 솔직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저도 평소에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대답을 준비하며 듣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었거든요.
이 소설이 던지는 메시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속도와 효율성보다 사람 사이의 온도가 관계를 지속시킨다
- 경청은 기술이 아니라 상대를 향한 태도에서 비롯된다
- 공감(empathy)은 받는 사람뿐 아니라 주는 사람도 치유한다
- 불편함이 오히려 진짜 만남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공감(empathy)이란 타인의 감정 상태를 인지하고 그 감정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심리적 반응을 말합니다. 단순한 동정(sympathy)과는 구별되는데, 동정이 "저런, 안됐다"에 머무는 반면 공감은 "나도 그랬어, 그 마음 알아"로 이어집니다. 소설 속 편의점이 불편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불편함이 사람을 붙잡습니다. 빠르게 결제하고 나가는 대신, 잠깐 멈추게 만듭니다. 그 멈춤 속에서 진짜 대화가 일어납니다.
타인을 위로하면서 시작되는 자기구원의 서사
독고씨의 정체는 소설 중반부터 서서히 드러납니다. 과거에 의사였던 그는 큰 실수를 저질렀고, 그 죄책감을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밑바닥으로 내려갔습니다. 편의점에서 사람들을 돌보며 조금씩 기억을 회복해가는 과정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내러티브 치료(narrative therapy)'의 구조와 맞닿아 있습니다. 내러티브 치료란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재구성함으로써 문제 중심의 자아상에서 벗어나는 심리 치료 기법입니다. 독고씨는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역설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쓸 용기를 얻게 됩니다.
제가 이 대목을 읽으면서 가장 오래 멈췄습니다. "타인을 위로하는 것이 정작 자기 구원"이라는 메시지가 단순한 미담이 아니라 정말 깊은 통찰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먼저 회복되어야 남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 순서를 뒤집습니다. 먼저 손을 내밀었더니 내가 살아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2023년 서울시복지재단의 자료에 따르면, 자원봉사 및 이타적 행동을 지속적으로 실천한 집단에서 우울감 감소와 삶의 만족도 향상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나타났습니다(출처: 서울시복지재단). 독고씨의 변화가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닌 셈입니다.
소설을 덮고 나서 지어지는 미소가 있었습니다. 억지로 지어진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번진 그 미소요. 김호연 작가는 참 따뜻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을 통해 사람의 온도가 전해진다는 것, 저는 이 책에서 처음 제대로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저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들어줄 사람을 찾는 데 급급한 건 아닌가. 독고씨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책을 덮은 뒤에도 한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점점 개인화되는 사회에서 외로움의 지수는 계속 올라가고 있습니다. 소통의 채널은 늘었는데 정작 진심으로 연결된 관계는 줄어드는 역설 속에서, 이 소설은 아주 조용하고 따뜻한 방식으로 물음을 던집니다. 지금 당신 곁에 그냥 들어줄 사람이 있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고 있습니까.
지쳐있는 분들, 연결되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거창한 위로가 아니라, 읽고 나서 조용히 옆 사람을 한 번 더 바라보게 만드는 책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독서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