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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한동안 다른 사람을 꽤 빠르게 판단하는 편이었습니다. 판단하는 생각을 멈추기 어려웠습니다. 어느 순간 제가 보는 것이 그 사람의 전부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한수지 작가의 그림책 《어떤 책》은 바로 그 착각에 조용히 균열을 냈습니다. 덮인 책 속에 혼자 남겨진 한 아이의 이야기인데, 읽고 나서 한참 동안 책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잊혀진 존재: 덮인 책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어떤 책》의 설정은 단순합니다. 누군가 읽다 덮어버린 책 속에 한 아이가 남겨져 있고, 독자가 다시 펼칠 때까지 그 아이는 혼자 밥을 먹고 꿈을 꾸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설정이 읽는 내내 묘하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여기서 핵심 개념이 하나 등장합니다. 바로 '서사적 방기(敍事的 放棄)'입니다. 여기서 서사적 방기란 독자나 창작자가 한 이야기 혹은 인물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포기하거나 외면함으로써 그 존재가 고립되는 현상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책을 덮는 순간 그 안의 세계를 버리는 행위입니다.
저는 이 개념이 독서의 영역을 훌쩍 넘어 실제 인간관계에 정확히 포개진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힘든 시기에 연락을 끊어버린 사람들, 귀찮아서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았던 누군가의 이야기. 저는 그냥 덮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탈인격화(depersonalization)'의 대인관계 버전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탈인격화란 타인을 완전한 인격체가 아닌 배경이나 기능으로만 인식하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이 책은 그 상태에 빠진 우리에게 "덮인 책 속에도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그림 한 장으로 조용히 보여줍니다.
- 덮힌 책 속 아이는 아무도 보지 않아도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꿈을 꿉니다
- 독자의 시선이 끊어져도 이야기 속 삶은 멈추지 않습니다
- 이는 우리가 외면한 관계 속 타인의 삶이 계속된다는 사실과 정확히 겹칩니다
읽기의 책임: 이야기를 대하는 태도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다
《어떤 책》은 '창작자'와 '독자'의 관계도 섬세하게 짚습니다. 책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완성하지 못한 이야기에 부채감을 느끼고, 독자는 다시 책을 펼치는 행위를 통해 잊혀진 아이를 발견합니다.
독서 행위를 단순한 정보 소비로만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게 절반만 맞다고 봅니다. 독서는 '텍스트-독자 상호작용(text-reader interactio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됩니다. 텍스트-독자 상호작용이란 독자가 글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맥락을 통해 능동적으로 의미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독자는 읽는 행위만으로 이미 그 세계의 공동 창작자가 되는 겁니다(출처: International Literacy Association).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르게 와 닿았습니다. 저는 타인의 평가를 지나치게 의식하면서, 역설적으로 제 자신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시간이 길었습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읽느냐에 집중하다 보니 제가 어떤 사람인지를 스스로 파악하는 일을 뒤로 미뤄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순서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먼저 자신을 읽어야 타인을 읽을 수 있다는 것.
인간관계에서 다양한 관점을 인정한다는 것도 결국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인식론적 겸손(epistemic humility)에서 출발합니다. 인식론적 겸손이란 자신의 지식과 판단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로, 철학과 심리학 양쪽에서 성숙한 사고의 조건으로 꼽힙니다. 무엇이든 다 맞다는 상대주의와는 엄연히 다른 개념입니다.
자기 이해: 나를 먼저 펼쳐야 타인을 볼 수 있다
벨기에 브뤼셀 왕립미술원에서 미술을 전공한 한수지 작가의 일러스트는 설명 대신 여백을 씁니다. 덮인 책 속 아이의 표정 하나, 홀로 앉아있는 구도 하나가 긴 문장보다 많은 것을 전달합니다. 이 절제된 시각 언어가 오히려 독자 스스로의 감정을 그 여백 안에 채워 넣게 만드는 구조입니다.
제 생각을 깨뜨린 부분이 있습니다. 그림책이라는 형식이 단순히 아이들용이라는 편견이 있었는데, 읽고 나서 한참이 지나도 잔상이 남았습니다. 이 책은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이라는 표현이 더 맞습니다. 특히 관계에서 지쳐있거나, 무언가를 중간에 포기했거나, 스스로를 오래 방치해 온 사람에게 더 깊이 닿습니다.
제가 직접 읽어보며 가장 오래 생각한 부분은 이것이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을 너무 빨리 결론 내리는 경향이 있었고, 그 경솔함이 누군가에게는 실제 상처가 됐을 수 있다는 것. 사람은 상황에 따라 계속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새로운 경험을 통해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갑니다. 한 번의 인상으로 그 사람의 책을 덮어버리는 건 저 자신의 한계를 그 사람에게 투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책이 구체적인 해결책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느끼는 독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림책의 특성상 방법론보다는 질문을 남기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 경우엔 오히려 그 열린 결말이 더 오래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답을 주는 책은 읽고 나면 끝나지만, 질문을 남기는 책은 덮고 나서도 계속 읽히니까요.
자주 묻는 질문
Q. 《어떤 책》은 어른이 읽어도 괜찮은 그림책인가요?
A. 오히려 어른에게 더 잘 맞는 책이라고 봅니다. 관계에서 지쳐있거나 잊혀가는 것들에 대해 아련함을 느끼는 성인 독자에게 깊이 닿습니다. 아이들보다 '덮어버린 것들'의 무게를 더 많이 알고 있는 어른이 읽을 때 이 책의 층위가 더 잘 보입니다.
Q. 그림책인데 내용이 너무 짧지 않나요?
A. 이 책은 정보를 전달하기보다 질문을 남기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문장의 양이 아니라 여백의 밀도로 독자에게 말을 거는 구조입니다. 짧게 읽히지만 읽고 난 뒤의 잔상은 훨씬 오래 남습니다.
Q. 한수지 작가는 어떤 배경을 가진 사람인가요?
A. 벨기에 브뤼셀 왕립미술원 등에서 미술을 전공한 작가입니다. 그림책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으며, 절제된 선과 여백을 활용한 감각적인 화풍이 특징입니다. 이 배경이 《어떤 책》의 시각적 완성도에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Q. 이 책이 인간관계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나요?
A.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타인을 바라보는 태도, 즉 '내가 보는 게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인식론적 겸손을 환기하는 데는 꽤 효과적입니다. 방법론이 아닌 관점의 전환을 원하는 사람에게 권합니다.
결론
《어떤 책》을 덮고 나서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사람이 생각났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진 건 아니었지만, 그 사람이 그 사이에도 계속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제 역할을 다한 것 같습니다. 나중에 안부 연락도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길 기대합니다.
삶은 나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이미 완성된 책이 아닙니다. 계속 써내려가는 중입니다. 한 사람을 너무 빨리 결론 내리지 말자는 다짐, 그리고 남이 나를 어떻게 읽는지보다 내가 먼저 나를 제대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 이 책이 남긴 질문들은 아직도 천천히 소화되는 중입니다. 관계에서 지쳐있거나, 잊혀가는 것들에 대해 아련함이 있다면 한번 펼쳐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