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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 저도 프랑켄슈타인을 괴물의 이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영화 포스터와 할로윈 코스튬이 그 이미지를 워낙 강하게 심어놓은 탓이겠지요. 실제 원작을 펼쳐들고 나서야 그 오해가 얼마나 표면적인 것이었는지 깨달았습니다. 1818년 메리 셸리가 18세의 나이에 완성한 이 작품은, 두 세기가 지난 지금도 과학기술의 윤리, 존재의 고독, 인간 욕망의 한계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습니다.
창조의 윤리: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만들어야 한다는 뜻인가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창조주의 책임'이라는 개념에서 멈춰 섰습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갈바니즘(Galvanism)을 연구하며 생명 창조의 가능성에 집착합니다. 여기서 갈바니즘이란 전기 자극을 통해 근육을 움직이게 하는 현상으로, 18세기 말 과학계를 뒤흔든 발견입니다. 쉽게 말해 당시 사람들에게는 "전기로 죽은 것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상상을 촉발시킨 이론이었습니다.
빅터는 그 가능성에 도취되어 피조물을 탄생시키지만, 막상 그 존재가 눈을 뜨는 순간 혐오감을 느끼고 도망쳐 버립니다. 이 장면을 읽으며 착잡함이 밀려왔습니다. 욕망에 이끌려 만들어놓고,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자 외면해버린 것입니다. 인간의 무책임함이 어디까지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소설 속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오늘날의 현실과 너무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AI 윤리(AI Ethics)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AI 윤리란 인공지능 시스템을 설계하고 운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편향, 차별, 책임 소재 등의 문제를 다루는 원칙 체계를 의미합니다. 유네스코는 2021년 AI 윤리에 관한 권고안을 채택하며, 기술 개발자와 국가가 피조물에 해당하는 AI 시스템에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출처: UNESCO).
빅터가 피조물에게 최소한의 돌봄조차 제공하지 않은 것처럼, 기술적 가능성이 곧 윤리적 정당성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책을 덮고 난 뒤에도 오래 남는 질문이었습니다. 무언가를 만들어낼 능력을 갖추는 것과, 그 결과물에 책임을 지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 말입니다.
존재의 고독: 외모로 판단받은 존재가 괴물이 되기까지
이 소설에서 제가 가장 마음이 무거워진 부분은 피조물이 한 가족을 몰래 관찰하는 장면입니다. 그는 인간의 언어를 익히고, 문학을 읽으며 감정을 배워갑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슬픔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가면서 인간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열망을 키워나갑니다. 처음부터 악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마다 돌아온 것은 이해가 아니라 공포와 폭력이었습니다. 소설 속 피조물의 고통은 오늘날의 사회적 낙인(Social Stigma) 문제와 겹쳐 보입니다. 사회적 낙인이란 특정 외모, 장애, 출신, 신분 등을 이유로 개인을 부정적으로 규정하고 배제하는 사회적 현상을 말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 그 사람의 내면과 가능성을 차단해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아이들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공부를 잘해야, 예뻐야, 스펙이 좋아야 인정받는다는 조건적 사랑이 만연한 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어떻게 될까요? 피조물이 외면당하며 분노와 복수심으로 변해간 것처럼, 조건 없는 수용을 받지 못한 존재는 서서히 달라집니다. 인간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기고, 존재만으로도 사랑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잊고 있는지 모릅니다.
피조물의 이 말이 지금도 머릿속을 맴돕니다. "내가 악한 이유는 내가 불행하기 때문이다." 타인을 겉모습과 조건으로만 판단하는 것이 한 존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이 소설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준 작품은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이 던지는 핵심 질문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창조자는 자신이 만든 존재에게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가
- 외모와 조건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우리의 편견은 정당한가
- 인간의 욕망에는 스스로 멈출 수 있는 한계가 존재하는가
욕망의 경계: 멈출 줄 아는 것도 능력이다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탐험가 월튼은 닮은꼴입니다. 두 사람 모두 남들이 도달하지 못한 지식을 향해 무한히 전진하려는 집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메리 셸리가 경고하는 것은 바로 이 오만함, 즉 휴브리스(Hubris)입니다. 휴브리스란 고대 그리스에서 비롯된 개념으로,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망각하고 신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오만을 뜻합니다. 이것이 비극의 씨앗이 된다는 것이 그리스 비극의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빅터는 결국 복수심에 눈이 멀어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추적하다 생을 마감합니다. 멈추지 못한 열정이 그를 파멸로 이끈 것입니다. 18세기 소설 속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생명공학(Biotechnology), 유전자 편집 기술, 인공지능 개발이 빠르게 진전되는 시대에 "할 수 있으니까 한다"는 논리는 너무나 위험합니다. 생명공학이란 생물체의 유전 정보를 분석하거나 조작하여 의료, 농업, 산업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하는 기술 체계를 말합니다.
OECD는 생명공학 기술의 급속한 발전에 따른 윤리 지침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며, 과학적 진보와 사회적 책임 사이의 균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출처: OECD). 기술적 진보는 막을 수 없지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어디서 멈출 것인지는 결국 인간이 결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며 18세의 메리 셸리가 이토록 날카로운 질문을 1800년대에 이미 던졌다는 사실에 솔직히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200여 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전혀 낡지 않은 이유는, 인간의 욕망과 오만함이라는 본질이 시대를 초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켄슈타인을 다 읽고 나서 오래 남은 것은 공포가 아니라 반성이었습니다. 제가 만들어낸 결과물에 끝까지 책임지고 있는지, 타인을 겉모습이 아닌 존재 자체로 바라보고 있는지, 그리고 제 욕망과 열정에 스스로 제동을 걸 줄 아는지. 독자에게 이 세 가지 질문을 남기는 소설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이유가 됩니다.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원작 소설로 직접 만나보시길 권합니다. 영화 이미지로 알고 있는 프랑켄슈타인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